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제9병단 (사령원 [[쑹스룬]]) ==== 장진호 전투의 주역이 된 제9병단은 이전 화둥야전군 산둥병단 등을 모아 제20·27·30·33군의 4개 군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이후 중국 남부에서 [[상하이]] 해방전 등 치열한 전투를 마무리한 뒤에, 1950년 1월에 대대적으로 재편된다. 우선 제30군은 지휘부를 해군으로 보내며 해체했고, 점령지 치안유지 목적으로 제33군도 떼어냈다.[* 제33군 소속 사단들은 이후 야전사단에서 일종의 무장경찰부대인 화둥공안군 소속으로 변경된다.] 대신 제23군이 편입되었고, 이어 제26군도 제8병단에서 제9병단으로 전속되어 제20·23·26·27군의 4개 군 체제가 된다. 이후 1950년 5월에는 제23군도 [[국민혁명군]] 잔적 소탕 임무에 동원되면서 [[6.25 전쟁]] 발발 당시에는 제20·26·27군의 3개 군만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전 [[국공내전]] 시기까지 전형적인 [[중국 인민해방군]] 사단은 예하 3개 연대와 1개 포병대대로 편제되었다.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고, 다시 3개 사단이 모여 1개 군을 이루었다. 이렇게 3개 하부단위가 모여 1개 상부단위를 구성하는 편제를 삼각편제라고 하는데, [[중국 인민해방군]]에서는 이를 '33제'라고 불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공내전]] 막바지인 1949년 2월에 일제히 단대호를 정리하면서 이 33제에 맞춰 순서대로 배정했기 때문에, 단대호만 알면 어느 부대인지 추정이 매우 쉬웠다. 예컨대 1950년 10월 운산 전투에서 한국군 제1사단에 일격을 가한 [[중국 인민지원군]] 부대는 제13병단 제40군 제120사단 제360연대였다. 제9병단 소속의 제20·26·27군도 1950년 초까지만 해도 이러한 삼각편제 공식에 따라 각각 제58·59·60(=20×3)사단, 제76·77·78(=26×3)사단, 제79·80·81(=27×3)사단이 기본 뼈대였다. 그러나 1950년에 연이어 진행된 부대 재편 과정에서 제9병단의 실제 전력은 이런 33제의 틀을 벗어나 한층 강화된다. 우선 1월에 제30군을 해체하고 지휘부를 해군으로 보내면서, 예하의 3개 야전사단(제88·89·90사단) 중 제88사단은 제26군에, 제89사단은 제20군 예하로 전속된다. 이어 [[6.25 전쟁]] 참전이 결정되자 1950년 10월에는 제32군을 해체하면서 남은 제94사단을 제27군으로 전속시킨다. 이를 통해 제9병단 소속 군들은 '''4개 사단'''씩을 거느리게 되었다. 여기에 각 사단의 병력도 보강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각 연대도 1개 대대씩을 추가 배속시켜 4개 대대 편성으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제9병단의 편제는 '44제'(1개 군당 4개 사단, 1개 연대당 4개 대대)라고도 한다. 특히 수개월의 참전 준비 과정에서 [[국민혁명군]] 출신 병력을 대거 편입시켜 외형상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국공내전]] 시기만 해도 충원이 제대로 안 되어 1개 사단 병력이 보통 6,500~8,500명, 심하면 그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제9병단의 각 사단은 1개 연대당 3,500~4,000명, 각 사단의 전체 병력은 평균 1만2천명이나 되었다. 사실상 인력 면에서는 '''완편에 도달'''하였다. 다만 문제는 병기와 피복 등 각종 물자의 부족이었다. 당시 가용한 물자들은 먼저 투입되는 제13병단에 집중적으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제9병단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애초에 제9병단은 1950년 말에 한반도에 곧장 들어갈 부대도 아니었고, 우선 둥베이(만주) 지방으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동계 적응 및 실전 준비 태세를 갖출 예정이었다. 이 때문에 제9병단의 주력부대는 미군 제10군단이 북진하고 있던 시점에도 아직 [[산둥성]]에서 허겁지겁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제9병단은 한반도 출병 이전에 기후가 온화한 중국 화둥 지방[* [[산둥성]], [[안후이 성]], [[상하이]] 등]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계 피복 등 혹한기 전투에 필요한 장비가 사실상 전무했다. 둥베이 지방으로 진입한 뒤에도 기본적인 솜 누비옷[* 겉은 카키, 안은 하얀색인데 상황에 따라 뒤집어 입었다고 한다.][* 매우 두텁고 따뜻하여 미군들이 주워서 애용하였다. 워낙 두꺼워 고기압에 의하여 약해진 총알을 상대로 방탄복 역할도 하였다는데, 그보다는 추운 날씨에 모든 것이 얼어붙는 바람에 여기에 튕겨 위력이 감해진 총알에 맞은 탓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 인민지원군]] 코트를 입은 어느 미군은 갑자기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고통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총알 몇 방이 관통 못하고 튕겨나간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을 정도. 반대로 중공군은 미군의 가죽코트를 애용하였다. 방수가 잘 된다고.]조차 제때 지급이 안 되어 장갑도 없이 홑옷을 껴입은 채 귀마개가 달린 털모자나 쓴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일부는 털 부츠를 신었지만 대부분은 고무를 댄 천[[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일체의 부대 표식은 없었고, 장교의 경우 바지에 주름이 잡혀 있으며 상의 좌측·목둘레 주변·소매에 붉은색 선이 있었다. 소총은 만주에서 노획한 일본식 소총이고, 박격포와 경기관총은 국민당군에게 노획한 미제가 다수였다. 개인당 탄약 80~100발과 방망이 수류탄을 몇 발 휴대하고 있었다. 운송수단은 극히 적어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야 했고, 그 외 가축을 약간 이용할 정도였다. 차량화/기계화는 당연히 꿈꾸기 어려웠으며, 무엇보다 차량운전 경험자가 매우 적어 이후 한국군과 초기 전투에서 대량의 미제 차량을 노획했어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길가에 버려두었다. 통신장비도 매우 열악하여 사단급 지휘부에나 무선통신 장비가 겨우 있었고, 연대급 지휘부 이상에나 유선통신 장비가 지급되었다. 대대급 이하에는 이런 통신장비가 없어 전령, [[나팔]], 뿔피리, [[호루라기]], [[꽹과리]], 신호탄, 전등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엔군 측 장진호 전투 참가자의 수기를 보면 [[피리(악기)|피리]]와 나팔 소리에 몸서리를 친다는 기록이 많다. 반면 중공군들이 미리 피리와 나팔을 울리며 신호를 주고 돌격하기 때문에 방어하는 쪽에서는 매우 편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런 각종 피복, 병기, 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중공군은 큰 인명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미군의 포위 섬멸이라는 작전 목표의 달성에도 실패하게 된다. 제9병단의 출격은 11월 5일 22시, [[마오쩌둥]]이 [[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원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며 본격화되었다. "강계, 장진 방면은 쑹스룬의 병단(제9병단)이 전력을 다해 맡고 적을 깊이 유인하여 기회를 보아 각개섬멸하는 것으로 방침을 확정한다. 이후 이 병단은 당신들이 직접 지휘하고, 우리가 멀리서 통제하지 않는다." 이 지시에 따라 [[펑더화이]] 등 [[중국 인민지원군]] 지휘부는 이튿날인 11월 6일자 전문을 통해 제9병단의 동부전선 작전 방향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적을 깊이 구진리, 장진선까지 유인하여 우선 미 해병 제1사단의 양 연대를 섬멸한다. 배치된 1개 군 주력(3개 사단)은 강계, 전천, 운송동, 남흥동을 경유하여 유담리 지구를 향해 집결하고, 선두 사단은 신속하게 구진리와 그 이북에 도착하여 종심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다른 1개 군은 임강, 자성강구에서 도강하여 운산리에 도착, 집결한다. 이러한 배치는 미 해병 제1사단이 구진리 이북으로 깊이 북진할수록 좋다. 양 군은 각 2개 사단이 정면을 담당하고, 7개 사단이 적 측후방에서 공격한다. 아군 제42군 주력은 사창리(국군 3사단 26연대)를 등지고 오로리를 향해 전진하고, 황초령 남쪽으로 깊이 진입해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증원하는 적을 타격한다. 유담 지구의 아군은 제42군 주력과 협동하여 미군 제7연대, (포병) 제11연대를 섬멸한다." 이 작전 구상에 따라 제20군, 제27군 병력이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 지구로 전개하게 된다. 제26군은 다소 출발이 지연되어 11월 26일에 후창(현재 [[김형직군]])에서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 전선에 축차 투입된다. [[파일:attachment/songshi.jpg]] [[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장군은 제9병단 사령원 겸 정치위원 [[쑹스룬]](송시륜(宋時輪), 1907-1991)이었다.[* 생년에 대해 일부 자료에서는 1899년생이라고 적고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근래 중국 측 자료에서는 모두 1907년 9월 10일생으로 적고 있다. 어쨌든 전쟁 외에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원체 드라마틱했던 시대에 80살을 넘겼으니 꽤 장수한 편.] 사진에서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아주 불 같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그의 불 같은 성격은 중공군이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만 집착하게 되어 나머지 부대가 무사히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는 당시 40대 초반이었지만 많은 중공군 장교들과는 달리 [[황포군관학교]]에서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다.''' 또한 홍군 초기부터 [[마오쩌둥]]의 부대에 가담하여 [[대장정]]에도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간 국민당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계속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전을 모두 겸비한 역전의 용사이자 전투에 잔뼈가 굵은 유능한 [[게릴라]]전 지휘자였다. 당시 중공군에는 계급이 없었지만, [[6.25 전쟁]] 이후 1955년 계급이 도입되자 상장에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천안문 6.4 항쟁]]이 발발하자 [[예페이]], [[장아이핑]] 등과 함께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구를 돌려서는 안 된다”는 서한을 [[중국공산당]]에 보낸 바 있다. 서방권에서는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작전능력 외에도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에서의 유혈진압 반대를 빼놓지 않으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공격이 개시된 11월 27일 기준 제9병단 예하 사단들의 상황은 아래와 같았다: 제20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 장이샹) 소속 4개 사단은 미군의 측후공격 임무를 맡고 있었다. * 제58사단: 하갈우리 포위(상평리 주둔)[* 172연대는 서쪽, 173연대는 동쪽에 배치. 174연대는 예비대] * 제59사단 (+제89사단 소속 1개 연대 증원): 유담리-하갈우리 연결 차단(신흥리, 서흥리 주둔) * 제60사단: 하갈우리-고토리 연결 차단. 고토리 북쪽의 감제고지 점령 후, 미군의 포위망 탈출 저지 및 증원 차단, 기회를 보아 고토리 점령(부성리, 소민태리 주둔) * 제89사단 (-1개 연대): 사창리 점령 후, 상통리-하통리 방향 진격. 군 예비대. 제27군 (사령관 펑더칭[* [[펑더화이]]의 이복동생이다. 계모가 낳은 아들이라 1910년생으로 펑더화이보다 12살이 어렸다고 하며, 쑹스룬보다 3살 아래였다. ], 정치위원 리야오원) 소속 4개 사단은 정면공격 임무를 맡고 있었다. * 제79사단: 유담리 공격 후, 제20군과 협력하여 유담리 이남으로 진출 * 제80사단 (+제81사단 소속 1개 연대 증원): 신흥리, 신대리, 내동치 점령 후, 사수리-하갈우리 방향 진격 * 제81사단 (-1개 연대): 운산리에서 기동부대로 운용, 1개 대대는 광대리에 파견해 미군 제7사단 주력 저지. 미7사단-미해병1사단 차단. * 제94사단: 후창군 강구리에서 한반도에 진입 중, 군 예비대로 운용(11월 28일에 유담리 지구로 전진 배치) 제26군 (사령관 장런추, 정치위원 류하오텐) 소속 4개 사단은 순차적으로 [[압록강]]을 도하하여 작전 투입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제76사단 * 제77사단 * 제78사단 * 제88사단 간단하게 설명해 20군-27군의 8개 사단 중 3개 사단은 장진호 서쪽에서 공격, 1개 사단은 동쪽에서 공격, 2개 사단은 하루 늦게 도착하여 장진호 남쪽의 보급로 차단 임무에 투입되면서 6개 사단이 1차로 동원되었다. 예비 부대인 제89사단은 우선 1개 연대만 제59사단에 배속되어 투입되었다가 제20군 전력이 급감하면서 추후 전 사단이 증원된다. 제27군 소속의 제94사단은 11월 28일부터 투입되어 제26군이 증원될 때까지 역시 격렬한 전투에 내몰려 큰 피해를 입었다.[* 제94사단만도 장진호 전투에서 총 사상자 3,591명의 손실을 입었다.] 12월에 들어서서 미군의 기세가 확실하게 꺾이자, 쑹스룬은 병단 예비대였던 제26군 병력까지 본격적으로 투입을 명령한다. 12월 1일에 투입 명령을 내릴 때는 단 2일 만에 전선으로 전개하여 12월 3일부터 전 군이 미군의 탈출을 봉쇄하라고 지시했지만, 혹한 속에서 이동 수단이 부족하고 길도 헤매는 바람에 실제로는 4개 사단 중에 제76·77사단의 2개 사단만 12월 6일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에서 낸 『항미원조전쟁사』 2권에 수록된 것이다. 중국 군사과학원에서 발간한 것이므로 사실상의 공식 전쟁사의 권위를 갖고 있는 서적이다.] 이들 제20·27군 소속의 8개 사단 및 제26군 소속의 2개 사단까지 도합 10개 사단은 전투 투입 시기에 상관없이 격전에 휘말려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최근 나오는 중국 측 자료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실제 투입된 사단을 총 10개 사단으로 집계한다. 반면 오히려 서방측 자료에서는 최근까지도 정확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전투서열 파악을 못하던 관계로, 이들 제26군 예하 부대를 장진호 전투가 거의 끝날 무렵 투입되었다는 이유로 참가 부대에서 누락시켜 6~7개 사단으로 축소 집계하는 경우들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